-분석내용 계속-

‘결승점이 가까워졌다’는 표현은 남성은 구체적으로 정액을 사정함으로써 성적 클라이막스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반하여 여성들은 도달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클라이막스에 오른 것처럼 거짓 몸짓과 연기를 하기도 한다. 그 가장 좋은 사례는 매춘부들이나 에로영화에서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교성을 지르거나 몸을 뒤트는 것이다.
그러나 2회에 걸친 오르가슴이라면 여성들의 클라이막스가 다가왔음을 거의 느낄 수가 있게 된다.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그는, “여신이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선물이 성공하기를!”하고 외치며 마지막 사과를 멀리 던졌다’는 표현은 남성이 더 이상 사정을 연장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자아의 의지를 버리고 오르지 자신의 객관화된 성본능이 이끌어가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며 여성을 다시 긴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성이 자신의 오르가슴을 견제한다. 그것은 여성적인 고결함, 우아함이 산짐승같고 동물적인 남성적인 성본능에 완전히 패배함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비록 오르가슴을 2회 맛보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성본능을 억제하면서 최소한의 여성스러움과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그녀로 하여금 몸을 돌려 그것을 줍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이 신화의 중심적인 주제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쭉 성행위를 해오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달리기로 상징되는, 자신의 등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동물적이고 산짐승같은 남성적인 성본능을 외면해 오다가 자신의 마음속에 그와 같은 격렬한 성본능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즉,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산짐승같은 격렬한 성본능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외적 정신인 여성다운 우아함과 고상함, 아르테미스처럼 톡톡 쏘는 듯한 여성특유의 견제심과 경계심을 해칠 우려가 있고 자신이 동물적인 성적욕구의 포로가 되어 이 남자 저 남자와 추잡한 성행위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경계코자 함이다.

‘몸을 돌린다’는 표현이 매우 중대한 표현으로 아탈란테가 앞에서 2회에 걸쳐서 황금사과를 주울 때는 몸을 돌린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마지막에 가서야 아프로디테로 상징되는 문명화된 성본능의 힘으로 몸을 돌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세와 태도의 변화를 상징한다. 몸을 돌리게 되면 바로 자신을 뒤따라오던 히포메네스라는 남성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남성적인 성본능의 존재를 인정하는 상징인 동시에 남성적인 인격 측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경주에 패배했다’는 표현은 자신의 동물적인 성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상징이며, 원숙함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거쳐야할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청년은 상품으로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은 남성은 여성이 자신의 고상함과 우아함, 여성적 자존심을 버리고 동물적인 성본능 욕구를 받아들이고 충족시켜줌으로써 여성을 정복했다는 정복감과 여성으로부터 남성적인 자신의 성본능을 인정받는 인정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집으로 상징되는 친숙한 의식에 통합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이 남성의 숙련된 손의 기술
로 오르가슴을 얻느냐 못 얻느냐의 문제보다, 여성이 동물적인 남성적 측면을 통하여 자신의 고결하고 우아한 여성적인 자질과 자존심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동물적인 인격측면을 받아들이고 결합해 나가는 심리적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녀간 성애의 시스템이다.
이와 같은 성애의 합일을 통해서 남성은 여성적인 고상함, 우아함 등을 받아들이고 여성은 남성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을 이해하고 수용해 나감으로써 인격이 한층 넓고 안정화되어가게 된다.

‘그러나 두 연인은 자기들의 행복에 흠뻑 취해 아프로디테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을 잊었다’는 표현은 남성과 여성들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성애의 합일과 오르가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갖게 됨으로 해서 그에 따를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을 간과함을 뜻한다.

‘그들의 배은망덕함에 노한 여신은 두 사람을 충동질하여 키벨레의 노여움을 초래하는 일을 저지르게 했다’는 것은 두 남녀가 자신들이 마치 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듯한 자세로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모든 사람을 성적인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어 자신의 본능에너지를 편중되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정신의 균형을 잃고 동물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이 무서운 여신을 모욕한 자는 누구라도 후환을 면할 수 없었다’는 표현은 키벨레는 그리스인들이 레아라고 부르는 여신으로 크로노스의 아내이자 제우스의 어머니로 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문명이 태어날 수 있는 여건을 상징한다.

키벨레가 결국은 그들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빼앗고 암사자와 수사자로 만든다는 구절에 있어서는 결국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남녀가 성애적인 합일을 통하여 성적인 쾌락을 맛봄으로써 자신들 속의 동물적인 면을 인정하고 결합하는 단계까지는 좋았으나 동물적인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문명화된 의식적인 영역이 아니라 본능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결국은) 중독성을 지녀, 성적인 본능이 문명화된 성의식과 자아를 압도함으로써 모든 남녀를 성적대상으로 바라보고 성적인 사냥에만 열중케 만드는 거칠고 음란한 인간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자는 동물은 물론 사람들까지 마구 잡아먹는 맹수로 공격적인 본능이 기타 온순한 동물들로 상징되는 균형잡힌 성본능과 인간적인 요소를 마구 삼켜버리는 정신적인 황폐와 인간성 상실을 수반한 성적 쾌락주의를 상징한다.
그리고 두 마리의 사자가 키벨레(레아) 여신의 수레를 끌게 되는 것은 키벨레로 상징되는 대지적인 본능영역이 두 마리의 사자로 상징되는 거친 성본능의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 문명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키벨레 여신이 베일을 쓰고 두 마리 사자를 양옆에 거느린 채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은 키벨레 여신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인간적인 측면은 베일로 가려져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반면 사자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성적인 본능만 그의 일상생활의 모두를 점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녀의 벽상금관은 탑이나 성의 흉벽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질벽이 금빛으로 변한 상태로서 이는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정신이 왕관으로 상징되는 최고의 정신원리와 이념으로 추구되는 쾌락주의적 문명을 상징한다.

아탈란테 이야기를 연상적 상징성으로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거의 접할 수 없는, 남녀간의 성행위시 전개되는 심리적인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여성의 질의 생식과 출산에 관련된 고유한 구조에 따라 남성 성기의 굵기나 대소에 관계없이 남성의 성기 자체만으로는 여성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오르가슴을 선사할 수가 없으며, 단지 대리석 벽을 스치고 지나가는 헐렁한 커튼과 같은 역할밖에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여성을 오르가슴상태로 이끌기 위해서는 잘 숙련된 손의 기술을 사용하여 여성의 예민한 성감대를 자극해야만 한다는 정보도 알 수 있었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달리 오르가슴을 수차례 이상 갖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화는 아울러서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아탈란테 이야기와 같이 여성을 성적인 오르가슴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남성들은 성적인 자신감을 갖게 되고 또, 이와 같은 남성의 숙달된 손에 의해서 성적인 오르가슴의 황홀한 쾌감을 맛보게 된 여성들은 성적인 쾌락을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성행위에만 몰두하게 되어 그들의 삶을 본능적인 삶의 수준으로 추락시킬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제목:그리스 로마 신화의 부활
     모봉구 지음-두레미디어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