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킨제이 보고서

쾌락으로서의 성을 입에 담지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이 동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금기의 시대, 과감한 연구로 침실의 비밀을 파헤친 과학자가 있다. 알프레드 킨제이의 연구 보고서, 50년 전의 현장으로 날아간다.

"전 아이가 배꼽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어요. 여기요." "성기에 키스를 하면...형이 그러는데 임신을 못할 수도 있데요. 진짜예요." 동성애, 혼외 정사, 자위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고, 공인된 부부 사이에서조차 '체위'가 무슨 말인 줄도 몰라야 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공기가 고스란히 침실을 지배하던 20세기 초. 강요된 수줍음이 판을 치던 그 시절. 베일에 가려진 가장 사적인 공간, 침실을 과감하게 뚫고 들어간 이가 있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성 연구자 중 하나인 알프레드 킨제이 박사(1894~1956)가 그다. 낯설고도 직접적인 그의 질문들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파트너의 수는?" "자위 행위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나?" "오르가슴을 언제 느꼈는가?" 가릴 건 없었다. 대학 졸업자 정도면 자위, 고환, 페니스, 질, 소변, 대변이란 표현을 썼고 저학력자에겐 딸딸이, 불알, 고추라는 표현으로 질문을 유도한 게 가렸다면 가린 거다. 적게는 300개, 많게는 521개, 비밀스런 침실 속사정에 대한 질문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 8천 명, 남성 5천3백 명. 무려 15년에 걸쳐 부부의 성교 횟수, 섹스 시간, 자위 경험, 장소, 여성 성감대 등이 빠짐없이 조사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성은 곧 죄악이라 여기며 눈쌀을 찌푸리던 사람들 중 무려 남성의 92%, 여성의 62%가 일상적으로 자위 행위를 하며 동성애를 한 번 이상 경험한 남성이 37%, 여성이 19%에 달했다. 또, 여성의 절반 정도가 혼전 성관계를 경험했으며, 26%가 혼외 정사를 즐기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도출됐다. 1만8천 명의 인터뷰를 조사, 분석한 이 보고서의 이름은 '뉴스위크'가 "다윈의 진화론 이래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과학서는 없었다"고 표현한 일련의 '킨제이 보고서'였다. 1948년 <인간에 있어서 남성의 성적 행동> 상하 두 권을 시작으로 1953년엔 <인간에 있어서 여성의 성적 행동>이 발표됐다.

이 중 미국 대중에게 특히 충격을 준 것은 <인간에 있어서 여성의 성적 행동>이었다. 12개국에서 번역, 한 달 만에 25만 부가 팔린 쾌거를 이룬 이 책에는 여성이 느끼는 오르가슴에 대한 조사 분석 결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경멸하고 순결을 강조하던 시절, 여자도 남자처럼 오르가슴에 탐닉하는 동물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 킨제이는 그 고정관념이 틀렸음을 과학적 수치로 입증했다. 여론의 질책이 이어졌고, 보수주의자들은 이 책을 같은 해 발표된 도색 잡지 <플레이보이>보다 더 위험천만한 금서로 낙인찍었다. 급기야 도서관 서가에서, 서점에서 책의 열람과 판매가 금지됐다.

그러나 반대편에선 킨제이의 연구 결과들이 성 생활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성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킨제이 보고서는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자리한 여성의 성적 자유 획득과 자기 표현, 여성 운동에 있어 여성의 성적 지위에 관한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금지된 성을 채집하다

처음부터 킨제이가 성 연구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성에 개방적 사람은 아니었다. 교사이자 주일 학교 목사였던 킨제이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동시에 강압적이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졌던 아내와의 잠자리는 성 지식에 대한 무지로 인해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자동차의 발명은 사창가로의 접근을 부추겼다고 비난받았으며, 전화기는 젊은 여성과 외간 남자의 내통을 조장한 부도덕한 물건으로 치부되었고, 남성들이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걸 용이하게 해준 지퍼는 가장 악질적인 발명품으로 손가락질받던 시절이었다. 킨제이 역시 그 사회에서 나고 교육받은 사람에 불과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이듬해 인디애나대학 동물학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동물들의 생태에 머물러 있었다. 손톱만한 크기의 어리상수리혹벌의 생물학적 다양성이 그의 연구 주제였다. 인디애나대학에 재직한 18년 동안 그의 24시는 곤충 표본을 수집하고 종별로 분류하는 데 바쳐졌다. 남들이 분위기 좋은 장소를 골라 이성에게 구애를 할 때 채집 장소였던 숲 속에서 무드 없는 사랑의 연서를 바쳤고, 남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석으로 신부에게 순정을 바칠 때 8천만 년된 호박 안에 든 혹벌로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던 이였다.

킨제이는 아버지로부터 '가방 끈 긴 놈이 벌레나 잡고 돌아다닌다'는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혹벌을 채집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혹벌에 미친 연구가로 살아왔으니 다른 샛길은 가당치도 않았다. 그러니까 평생 연구 과제가 된 인간 성생활에 대한 탐구는 순전히 작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1938년, 당시 인대애나대학 여학생회는 약혼을 했거나 결혼한 학생, 또는 결혼을 앞둔 학생을 위한 성교육 강좌 개설을 학교 측에 건의했다. 그 이전까지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성적 묘사가 들어 있는 저작물은 물론, 기본적인 피임 정보가 실린 자료를 학내에 가져오는 것조차 위법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보수의 기운과는 달리 성행위는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학 측으로선 '불온한' 성행위를 즉각 중단시키고, '안온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결혼과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교육 강좌가 마련되었고, 대학 교수 중 성실하고 실력 있는 킨제이가 적임자로 물색됐다. 학문적 호기심이 킨제이로 하여금 제의를 수락하게 했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자 제대로 된 과학적 자료 하나 없는 현실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급기야 킨제이는 조사 표본의 개수가 과학적 신뢰도를 높인다며 10만 점, 20만 점 혹벌을 채집하던 열성 그대로, 인간 성 생태를 증명해 줄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혈류를 이용 성적 흥분도를 측정하거나, 뇌 영상 촬영을 통해 감정 제어 경로를 연구할 수도 없었던 당시, 킨제이가 표본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명 한 명을 직접 대면하고 조사하는 개별 인터뷰뿐이었다. 그 엄청 나고 지난한 시간을 킨제이는 견뎌냈다.

금지된 성을 깨부수다

1956년, 미국의 유명 연예인 리버레이스의 동성애 재판은 당시 사회상을 극명하게 말해준다. 사태는 런던의 '데일리 미러'지가 교묘하게 빗대는 말투로 리버레이스가 동성애자라고 폭로한 데서 시작됐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명사에 대한 찬사로도 비춰지겠지만 당시엔 엄청난 욕설과 모욕에 다름없었다. 이에 리버레이스는 공개적이며 공식적으로 자신의 '남자의 성'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런던 법원에 제기했다. 이 사건은 50년대 당시만 해도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동성애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낸 계기가 됐으며, 이를 통해 당시 미국사회의 성 도덕과 성 규범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었다.

킨제이 보고서가 세상에 발표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성행위가 쾌락으로 인정받기 이전인 40년대와 50년대 킨제이는 성을 양지로 끌어올렸다. 보수적인 교회의 반발을 예상치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기승을 부리던 매카시즘 열풍은 킨제이에게 엄청 난 타격을 안겨준다.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미 하원 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연구 자료가 압수 조사되더니, 급기야 후원자였던 록펠러 재단이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평생 매진해온 연구 결과를 기록할 자금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여의치 않던 상황에서도 연구를 강행하던 킨제이는 2년 후 돌연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피로로 인한 급성 폐렴이었다.

핵심은, 교회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기도를 하더라도 세상의 도덕적 시계 바늘이 킨제이 보고서를 발표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는 데 있다. 그때까지 2세를 생산하기 위한 절차로만 여겨졌던 성 관념은 킨제이 보고서에 의해 서서히 뒤바뀌고 있었다. 1940년 발명된 페니실린으로 임질이나 매독 등 성병의 치료가 가능하게 됐으며, 피임법이 개발된 1960년을 불과 몇 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생식만을 위한 성은 종식을 고하고 있었다.

금지된 성을 재조명하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킨제이 박사가 일으킨 파장이 또 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 <시카고>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빌 콘돈 감독이 영화 <킨제이 보고서>를 발표, '성 선구자' 킨제이 박사의 일대기를 50년이 지난 지금 스크린에 불러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과거로부터 불러낸 것은 단지 킨제이만이 아니었다.

역사적 증언과 킨제이가 쓴 글들, 관련 자료들과 네 권의 전기를 읽는 데 콘돈이 소요한 여섯 달의 기간은 꼬박 1만8천 명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성적 행동을 기록하고 결과치를 도출했던 킨제이의 노력에 비하면 수고도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영화가 발표되고 나서 벌어졌다. 50년 전 킨제이의 연구를 괴롭혔던 보수단체의 입김은 종교적 보수주의 색채가 날로 짙어지고 있는 작금의 미국에 또다시 재현됐다. 기독교 복음주의, 여러 가톨릭 단체, 보수적 여성 단체 등 셀 수 없이 많은 보수 단체들이 <킨제이 보고서>에 대한 보이콧을 벌였고, 킨제이 박사에 대한 비판 및 격하 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영화가 킨제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 킨제이의 연구 결과까지 과장하고 미화한다"는 것이 이들이 내린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그들은 "킨제이는 우리 세대를 에이즈, 성병, 포르노, 낙태라는 파괴적인 결과와 마주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소리 높였으며, "킨제이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나치 의사 요제프 멩겔레나 할리우드 호러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과학자"라고 비난했다. 지난 미국 대선 때 부시 대통령의 승리를 견인한 핵심 세력이기도 했던 이들 단체들은 급기야 '음란 오락물의 제작을 지원하면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의 입법까지 추진하고 나섰다.

사실 50년 전의 킨제이 보고서는 보수주의자들의 이 같은 비난에 충분히 답할 수 없는 허점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미국의 평범한 남녀를 대상으로 했다는 표본 집단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죄수와 매춘부에 치중되어 편파적이라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었으며, 질의 응답에 의해 도출된 결과치들은 이론적으로 정립하기엔 부실한 면이 있었다. 또한 킨제이 자신 역시 사회적, 성적 위계 질서를 완전히 떨치진 못한 모순을 안고 있었다. 교육받은 중산층 백인일수록 훨씬 세련된 성생활을 한다는 식의 '편향적' 연구 결과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에 대해 한국성과학연구소 이윤기 박사는 "킨제이 보고서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같은 필독서는 아니다. 기념비적 의미야 다분하지만, 과학적 체계를 찾기엔 한계가 있다"며 킨제이 보고서가 갖는 현재의 위치를 설명한다.

킨제이 조사에만 근 몇 개월을 매달린 콘돈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킨제이 보고서가 낡은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한들, 킨제이의 질의 응답이 현 성생활과는 한참 동떨어진 편파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한들, 킨제이가 과학을 왜곡하고 성 관습을 더렵혔다고 비난을 받는다 한들, 킨제이의 작업 자체를 무(無)로 돌릴 수는 없었다. 콘돈은 당시 킨제이가 제기했던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고, 주목받아야 하며, 끊임없이 연구해야 할 화두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성생활은 무조건 침실 깊숙이 숨겨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50년대 미국이라는 보수적인 사회, 그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킨제이는 가장 비밀스럽고 은밀한 이야기를 공공연히 꺼내놓은 인물이었다. 그건 인간의 성적 행동에 있어 다음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용감한 서곡이었다. 콘돈 감독은 바로 그 순간에 박수를 보낸 셈이다. 영화 <킨제이 보고서>가 혹여 킨제이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차 있다 한들, 그걸 무조건적인 경배가 아니라 인류 문화의 역사적 전환에 대한 유의미한 기록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화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