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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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포스터(왼쪽),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 포스터 (베로니카 프랑코 역시 황진이와 거의 같은 인생의 길을 택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기생 황진이. 그녀에 관한 일화는 소설과 TV 드라마 그리고 영화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 북한작가 홍석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금강산에서 촬영을 하는 등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을 뿐만 아니라 송혜교의 연기 변신이 기대된 작품이기도 하다.
양반과 평민 간의 갈등을 부각시킨 원작과는 달리, 놈이와의 운명적 사랑을 메인 플롯으로 이끈 이 영화는 기존의 황진이 이미지와도 차별화를 보이고 있다. 예인(藝人)이자 천한 신분으로서의 단순한(?) 기생보다는 양반에서 노비 신세로 추락하는 주인공의 신분적 갈등구조와 사회를 향한 냉소주의와 깊은 슬픔이 드리워진 것이다.
영화는 황진이(송혜교 분)가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 기거하는 노비 출신인 놈이(유지태 분)와 저잣거리를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로 좋아하지만 신분적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 그녀의 평탄했던 인생의 전환점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양반댁 마님이 아니라 노비였다는 비밀이 들통 나서 파혼 당하고부터이다. 더욱이 그 비밀을 발설한 사람이 자신의 첫사랑인 놈이일 줄이야.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더 이상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던 그녀는 세 가지 길로 고민한다. 양반의 첩이 되거나, 노비 신분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기생이 되는 길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생을 선택한다. 그것이 비록 천한 신분으로 비웃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략)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첫인상은 조선시대의 여성과 동시대 유럽 여성의 위치가 어쩌면 그렇게 유사할까라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아마도 황진이가 비장하게 자신의 진로를 언급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녀는 양반의 첩실로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천한 신분임에도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는 기생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서양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고 자유를 보장받은 여성은 귀족신분이 아니라 고급 매춘부인 ‘헤타이라’였다. 그리고 황진이가 생존했던 16세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황진이와 운우의 밤을 보내고 나서 시를 쓰는 벽계수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Dangerous Beauty, 1998)은 코르테산(고급 매춘부)으로 이름을 날렸던 베로니카 프랑코(Beronica Franco, 1546~ 1591)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베니스에서 코르테산은 신분상으로는 귀족부인과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인간적인 삶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성처럼 교육을 자유롭게 받을 수 있으며, 아내와 가문이라는 틀 속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위기에 빠진 베니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헨리 3세의 마음을 사로잡아 군함을 지원케 했다고 전한다. 베로니카는 황진이처럼 문학적인 재능도 탁월하여 1575년에는 남성 여섯 명과 함께 쓴 시집을 출간했으며, 1580년에 발간한 시집에는 오십 편의 편지와 헨리 왕에게 보내는 두 편의 소네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자유와 이상을 위해 기생으로 뛰어든 황진이나 코르테산으로 몸을 던진 베로니카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가로 막힌다. 그것은 황진이가 제아무리 멋진 시를 쓰고 권세가의 얼을 빼놓을 정도의 미색과 화술을 지녔을지라도 기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듯, 베로니카도 매춘부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적의 손에 유린당할 위기에서 베니스를 구한 베로니카도 흑사병이 유행하자, 마녀로 몰려 처형당할 뻔 했다.
사실 마녀사냥은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방패 역할을 했다. 영화에서 어느 성직자는 흑사병으로 베니스에서만 5만 6천 명이 사망했다면서 극도의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마녀 혐의를 쓴 매춘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좋든 싫든 창녀들의 피를 원하고 있소.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불태울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베로니카를 마녀로 몰아 책임을 전가한 것도 그녀가 바로 매춘부라는 신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녀는 무죄판결은 받았으나 전 재산을 몰수당한다.
<황진이>의 개봉을 앞두고서 평단과 관객들은 <가을동화> <올인> <풀하우스> 등의 TV 드라마와 영화 <파랑주의보>에서 보여준 -착하고 발랄한 이미지-의 속칭 송혜교표 캐릭터가 얼마나 변할까 기대하였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송혜교는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관객에게 어필했으며,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캐릭터를 잘 살렸다고 본다. 혹자는 이를 두고 송혜교의 미모뿐만 아니라 내면연기가 아주 돋보였으며 특히 한복의 맵시와 아름다운 선을 두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면도 있다. 품위있고 지적인 모습으로 당대의 엄격한 신분질서에 저항하는 모습은 뛰어났지만, 권세가를 비롯한 양반계급의 남성들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뇌쇄적이며 관능적인 이미지는 다소 부족했다. 영화 속에 비쳐지는 황진이의 모습은 기생보다는 정숙하고 품위있는 여성상이 느껴진다.
끝으로 <황진이>는 2시간 20분이라는 짧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송혜교와 유지태 그리고 사또 역을 맡은 류승용의 열연과 함께, 금강산의 수려한 영상이 관객을 사로잡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세계일보 e-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