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The Accused, 1988)은 감독 조너선 캐플런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역작이자 조디 포스터에게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집단 성폭행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후에도 강간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피고인>을 능가하는 문제작은 없는 것 같다. 그 만큼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며 사실적이다. 남성들의 왜곡된 성관념을 질타한 이 작품의 모티브는 매사추세츠 뉴 베드포드의 어느 술집에서 일어난 집단강간 사건이다.
 
▲성범죄 영화의 전형을 이룬 영화 <피고인>. 강간범 보다 사회적 무관심과 방기가 더 무서운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 조너선 캐플런 필름
영화의 내용은 실제 사건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은 바, 사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3년 3월 6일, 술집 안에서 15명이 환호를 지르는 가운데, 여러 명의 남자가 21세의 여성을 윤간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두 남자가 오럴섹스를 강요했고 다른 두 남자는 당구대로 끌고 가서 성폭행했다. 영화에서는 단지 세 사람이 강간을 범하고 세 명이 강간을 유도하는 교사죄를 저질렀을 뿐, 나머지 손님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 설정했다. 즉 영화보다 실제가 더 참혹했던 것이다. 더욱이 한 남성은 경찰에 신고하려는 바텐더를 제지하고 엉뚱한 전화번호를 누르는 등, 범죄를 도왔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뉴 베드포드의 많은 시민이 분노하였으며, 그 술집은 곧 폐쇄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지역에 사는 포르투갈계 주민은 강간범들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피해 여성이 술집에 들어와서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헤픈 웃음을 짓는 행동 자체가 성범죄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성폭행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으나, 그 이면에는 가해자들이 바로 포르투갈계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인종적 갈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가해자들을 단지 백인으로 설정하였다.
 
피해 여성에게도 강간죄의 일부 책임이 있는지를 놓고 벌어진 법정 공방은 전 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여섯 명의 피고인 중에서 네 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징역 6년에서 12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속칭 강간신화의 전형을 보여준 영화 <피고인>. 이 영화에서 필자가 큰 충격을 받은 장면은 주인공 사라(조디 포스터 분)가 술집에서 여러 명의 남자에게 윤간 당했다는 점보다, 범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손님들의 행동에 있다. 이들은 한 여성이 성적 유린을 당하면서 고통과 치욕 속에 몸부림칠 때, 신고하기는커녕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마치 프로야구 경기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피고인>이 보여준 이러한 왜곡된 성관념은 비단 미국의 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를 비롯한 여러 여성영화에서 '강간신화'를 비롯한 남성의 잘못된 성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니 요즈음은 영화 이상으로 현실이 더욱 참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한국은 강간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수십 차례 윤간 해도 처벌은 너무나 미약하다. 학교당국은 감추기 급급하고 피해 여학생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 가해자는 멀쩡히 학교 다니고 피해자가 죄인인양 취급받는 사회. 성인 범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몇 차례 미성년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1세 된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범죄를 저질러도, 재판부가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언도하는 실정이다. 바로 어제 뉴스에는 여러 차례 강간죄로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던 전과자가 부녀자를 성폭행 끝에 살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긴 죄 없는 수십 명을 살해한 범죄자를 두고 인권이니 어떠니 하는 말들이 오가는 세상이니 할 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성범죄에 적용되는 형량은 누가 뭐래도 너무나 가볍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는 아동 성폭행범에게 무조건 종신형을 선고하는 법안이 입법화 되었으며, 미국 플로리다 주의회에서는 <제시카 런스퍼드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은 최저형량을 25년으로 높이고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팔찌를 채워 집중감시토록 하는 것이다.
 
혹자는 중형이 성범죄 발생률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수백 명을 성폭행하고 심지어 강간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유기해도 기껏해야 무기징역을 받는 나라에서 법을 무서워할 범죄자가 있을까. 당한 사람만 억울하고 하소연할 길 없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출처: 세계일보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