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와 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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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04년 01월 30일 (금) 11:09
(::김용희 평론집시인분류 유감 ― 강신애시인 반박 글::)
문학평론가 김용희씨의 평론집 ‘페넬로페 의 옷감짜기’(문학과 지성사)가 논란을 빚고 있다. (문화일보 26 일자 22면 참조) 평론집은 남성적 언어 에 갇힌 여성서사를 회복 하기위해 여성시인 13명을 6 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평론 집의 분류가 오히 려 남성중심적 시각의 반복, 혹은 그보다 더한 후퇴라 는 지적과 함께 그 적절성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거명된 시인들은 대단히 불쾌하다며 반발하고 있 다. 시인 강신애 씨가 긴 반박의 글을 보내와 전체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요약했다.
문학평론가 김용희씨는 최근 평론집 ‘페넬로페의 옷 감짜기’에 서 우리 시대 여성 시인 13명의 시를 아마 존적 여성, 사디즘적 여성, 모성적 여성, 구도자적 여 성, 창녀적 여성, 몽상적 여성으 로 분류했다. 하지 만 그녀가 왜곡되고 비틀려있는 여성서사를 새 로 쓰 기 위해 여성시를 분류하면서 동원한 언어는 주모, 마 녀, 기생, 수도자, 창녀, 주술사 등이다. 기존의 남성 들 언술에서 그다 지 멀리가지 않았다.
여성은 왜 마녀 아니면 주모, 수녀 아니면 기생, 혹 은 창녀여야 하는가. 이러한 구분은 진정한 여성의 본 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아 를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일하고 노력하는, 평범하지 만 진실된 여성이 우리 주위에 더 흔하지 않 은가? 여 성시인도 거기에서 별로 먼 곳에 있지 않다.
더욱 문제인 것은 여성을 어느 한 부류에 규정함으로 써 그들이 가진 많은 부분을 사장시키는 것이다. 시인 의 시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해야 한다. 부단 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실 험을 꿈꾸며 자신 의 언어를 재수립해 나아가는 시인의 유형화는 독자들 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시인의 앞길에 하나 의 장 애가 될 수 있다.
그녀는 나와 이경림 시인을 창녀적 여성으로 분류하면 서 창녀적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지극히 독립적이고 남성을 극단적으로 혐 오하나 남성을 매개로 경제적 자립이 성립되기에 한편 남성을 그 리워한다’고 정의 했다. 이경림 시인과 나의 시 어느 부분이 이 러한 진 술과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책과 사적인 대화에서 그 녀는 창녀적 여성을 ‘정념의 여인’, ‘매력적인 여 인’이라는 의미 로 썼다고 했지만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에게 의존적인 여인이 그 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는 않는다.
시인들을 분류하고 유형화 하는 작업이 어느 한 시점 에서 요구되 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에 신 중을 기해야 한다. 더구 나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활자화된 말 한마디가 갖는 파급력 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마치 소설 ‘주홍글씨’ 여주인공의 가 슴에 ’ A’라는 표지를 달아 거리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 로 인해 시인이 받게 될 몰이해와 가족, 혹은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지 묻고 싶다.
김용희씨는 남성에 의해 관리되고 명명된 여성의 현실 과 정체성 을 새롭게 되찾아 주려는 드문 노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녀가 나와 이경림 시인의 시를 성심 껏 읽어주고 분석해준 것에 대해서 도 고마움을 표하 고 싶다. 그러나 의도의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선택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자칫 여성 이 여 성에게 가하는 또 하나의 언어 폭력이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강신애(시인)
(::김용희 평론집시인분류 유감 ― 강신애시인 반박 글::)
문학평론가 김용희씨의 평론집 ‘페넬로페 의 옷감짜기’(문학과 지성사)가 논란을 빚고 있다. (문화일보 26 일자 22면 참조) 평론집은 남성적 언어 에 갇힌 여성서사를 회복 하기위해 여성시인 13명을 6 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평론 집의 분류가 오히 려 남성중심적 시각의 반복, 혹은 그보다 더한 후퇴라 는 지적과 함께 그 적절성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거명된 시인들은 대단히 불쾌하다며 반발하고 있 다. 시인 강신애 씨가 긴 반박의 글을 보내와 전체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요약했다.
문학평론가 김용희씨는 최근 평론집 ‘페넬로페의 옷 감짜기’에 서 우리 시대 여성 시인 13명의 시를 아마 존적 여성, 사디즘적 여성, 모성적 여성, 구도자적 여 성, 창녀적 여성, 몽상적 여성으 로 분류했다. 하지 만 그녀가 왜곡되고 비틀려있는 여성서사를 새 로 쓰 기 위해 여성시를 분류하면서 동원한 언어는 주모, 마 녀, 기생, 수도자, 창녀, 주술사 등이다. 기존의 남성 들 언술에서 그다 지 멀리가지 않았다.
여성은 왜 마녀 아니면 주모, 수녀 아니면 기생, 혹 은 창녀여야 하는가. 이러한 구분은 진정한 여성의 본 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아 를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일하고 노력하는, 평범하지 만 진실된 여성이 우리 주위에 더 흔하지 않 은가? 여 성시인도 거기에서 별로 먼 곳에 있지 않다.
더욱 문제인 것은 여성을 어느 한 부류에 규정함으로 써 그들이 가진 많은 부분을 사장시키는 것이다. 시인 의 시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해야 한다. 부단 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실 험을 꿈꾸며 자신 의 언어를 재수립해 나아가는 시인의 유형화는 독자들 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시인의 앞길에 하나 의 장 애가 될 수 있다.
그녀는 나와 이경림 시인을 창녀적 여성으로 분류하면 서 창녀적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지극히 독립적이고 남성을 극단적으로 혐 오하나 남성을 매개로 경제적 자립이 성립되기에 한편 남성을 그 리워한다’고 정의 했다. 이경림 시인과 나의 시 어느 부분이 이 러한 진 술과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책과 사적인 대화에서 그 녀는 창녀적 여성을 ‘정념의 여인’, ‘매력적인 여 인’이라는 의미 로 썼다고 했지만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에게 의존적인 여인이 그 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는 않는다.
시인들을 분류하고 유형화 하는 작업이 어느 한 시점 에서 요구되 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에 신 중을 기해야 한다. 더구 나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활자화된 말 한마디가 갖는 파급력 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마치 소설 ‘주홍글씨’ 여주인공의 가 슴에 ’ A’라는 표지를 달아 거리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 로 인해 시인이 받게 될 몰이해와 가족, 혹은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지 묻고 싶다.
김용희씨는 남성에 의해 관리되고 명명된 여성의 현실 과 정체성 을 새롭게 되찾아 주려는 드문 노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녀가 나와 이경림 시인의 시를 성심 껏 읽어주고 분석해준 것에 대해서 도 고마움을 표하 고 싶다. 그러나 의도의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선택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자칫 여성 이 여 성에게 가하는 또 하나의 언어 폭력이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강신애(시인)